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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탄생 8편 - 기아자동차 1편,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이름

by Zzeus 2026. 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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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가장 오래된 이름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자전거 부품으로 시작해서 자동차까지,
1944년부터 80년간 이어온 기아의 꿈을
함께 만나보겠습니다. ㅎㅎ

1944년 12월 11일, 서울 영등포

열일곱에 일본에서 자전거 기술을 배운 김철호가 경성정공을 설립했습니다. 사실 이건 자동차 회사가 아니었는데 그 이유는 자전거 부품을 만드는 작은 공장이었고, 당시 한국은 일제 강점기 마지막 해였으며, 해방도 되기 전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김철호는 창립 연설에서 "자전거가 완성되면 자동차, 자동차가 완성되면 비행기를 만들겠다"고 선언했고, 그 꿈이 80년 후 현실이 되었습니다.

기아(起亞)라는 이름은 "아시아에서 일어난다"는 뜻이었는데, 한국을 넘어 아시아, 나아가 세계로 나가겠다는 의지였고, 그 이름이 2024년 현재 전 세계에서 팔리는 자동차 브랜드가 되었습니다. 오늘은 자전거 부품 공장에서 출발한 기아의 첫 번째 이야기를 만나보겠습니다.

1974 기아 브리사 베이지 크림 ㅡ AI 이미지

🚲 1944-1961년, 자전거에서 오토바이까지

1944년 12월 11일 김철호가 서울 영등포구 도림동에 경성정공을 세웠는데, 처음에는 자전거 부품을 만드는 게 전부였고, 직원 몇 명의 작은 공장이었으며, 전쟁 중에도 꿋꿋이 버텼습니다. 1945년 해방이 되었고, 1950년 기아산업으로 이름을 바꿨으며, 1952년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부산 피란 시절에 최초의 국산 자전거 "삼천리호"를 만들었습니다. 전쟁 중에 자전거를 만들었다는 게 놀라운데, 김철호는 전쟁이 끝나면 사람들이 이동 수단이 필요할 거라고 생각했고, 미리 준비했으며, 전쟁이 끝나자마자 삼천리 자전거가 불티나게 팔렸습니다. 하지만 1960년 자전거 사업이 적자에 빠졌는데, 경쟁이 치열해졌고 수익이 줄었으며,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습니다. 은행 관리를 받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김철호는 포기하지 않았는데, 1961년 일본 혼다와 손잡고 국내 최초 오토바이를 만들었고, 두 바퀴에서 세 바퀴로 나아가는 발판이 되었습니다.

1962년 일본 마쓰다와 기술 제휴로 삼륜 화물차 K-360을 만들었는데, 배기량 356cc의 작은 차였지만 한국에서 처음 만든 삼륜차였고, 기아가 진짜 자동차 회사로 발을 내디딘 것이었습니다. 시장 반응이 좋았는데, 소상공인들이 화물을 실어 나르는 데 유용했고, 저렴하면서 실용적이었으며, 기아의 자동차 기술이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1970년에는 4륜 화물차까지 출시했는데, 삼륜에서 사륜으로 발전했고 수송 능력이 늘었으며, 기아가 상용차 분야에서 입지를 굳혀가고 있었습니다. 1970년 경기도 시흥 소하리에 20만 평 규모의 공장 부지를 마련했고, 1973년 국내 최초 종합자동차 공장을 완공했으며, 연간 25,000대 생산 능력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이제 진짜 자동차를 만들 준비가 된 것이었고, 1973년 설립자 김철호가 타계했지만 장남 김상문이 경영을 이어받았으며, 아버지의 꿈을 이어가기로 했습니다.

🚗 1974년, 브리사의 탄생

1974년 4월 6일 브리사가 출시되었는데, 기아 최초의 승용차였고 한국 최초의 독자 개발 승용차였으며, 마쓰다 패밀리아를 기반으로 했지만 국산화에 집중했습니다. 1,000cc 엔진에 4도어 세단이었고, 가격은 125만 원으로 당시 상당히 비쌌지만, 자동차를 살 수 있는 중산층 이상이 줄을 섰습니다. 브리사가 특별했던 이유는 국산화율이었는데, 출시 2년 후인 1976년에 국산화율 89.5%를 달성했고, 심지어 엔진까지 국산화했으며, "기술의 기아"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같은 시기 현대 포니가 독자 개발로 유명했지만 기아 브리사는 엔진 국산화에서 앞섰고, 기술 자립이라는 측면에서 더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기아 엔지니어들의 자부심이었습니다. 1976년에는 아시아자동차를 인수했는데, 록스타의 아시아자동차였고 기아 라인업이 더 넓어졌으며, 승용차부터 SUV, 상용차까지 갖추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1980년 정부가 자동차산업 합리화 조치를 발표했는데, 현대는 승용차, 기아는 소형 트럭과 버스만 만들라는 명령이었고, 기아가 힘들게 키워온 승용차 사업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억울했지만 어쩔 수 없었는데, 박정희 정부가 추진한 산업 구조조정이었고 거부할 수 없었으며, 기아는 1981년부터 승용차 생산을 중단했습니다. 1980-1981년 2년간 500억 원의 적자를 내며 거의 무너질 뻔했는데, 승용차도 못 만들고 트럭과 버스만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었고, 직원들이 떠나기 시작했으며, 회사 미래가 불투명했습니다. 1981년 10월 김선홍 사장이 취임하면서 변화가 시작되었는데, "봉고"라는 소형 트럭을 내놓았고 대박이 났으며, 기아가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봉고는 자영업자들에게 꼭 필요한 차였는데, 작고 실용적이었으며 가격도 적당했고, 지금도 "봉고차"가 소형 트럭의 대명사가 된 것은 그때의 성공 덕분이었습니다.

🌍 1987년, 프라이드와 세계로

1987년 자동차 합리화 조치가 해제되면서 기아가 다시 승용차를 만들 수 있게 되었는데, 7년 만의 귀환이었고 기아 엔지니어들이 얼마나 간절히 기다렸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1987년 2월 프라이드가 출시되었는데, 마쓰다와 포드의 기술이 결합된 소형차였고 기아의 생산력이 더해졌으며, 포드의 전 세계 판매망을 통해 미국에서 "포드 페스티바"라는 이름으로 팔렸습니다. 프라이드는 국내에서도 엄청나게 팔렸는데, 합리적인 가격에 실용적인 크기였고, 연비도 좋았으며, 1990년대 초반까지 기아의 주력 차종이 되었습니다. 미국에서도 인기가 있었는데, 저렴하고 경제적인 소형차를 원하는 미국 소비자들이 샀고, 기아가 처음으로 미국 시장에서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훗날 미국 시장 공략의 발판이 되었습니다. 1987년 콩코드도 나왔는데, 마쓰다 카펠라 기반 중형 세단이었고 더 큰 차를 원하는 소비자를 겨냥했으며, 1989년 캐피탈까지 추가되면서 기아 라인업이 풍성해졌습니다.

1990년 기아산업이 기아자동차로 이름을 바꿨는데, 진짜 자동차 회사가 됐다는 선언이었고, 소하리에서 아산만까지 공장도 늘었으며, 생산량이 빠르게 증가했습니다. 1992년 포텐샤가 나왔는데, 대형 세단이었고 현대 그랜저와 경쟁하는 포지션이었으며, 기아도 큰 차를 만들 수 있다는 걸 보여줬습니다. 1993년 스포티지가 출시되었는데, 기아의 첫 SUV였고 아시아 록스타보다 크고 현대적이었으며, 해외에서도 팔렸습니다. 특히 미국 시장 반응이 좋았는데, 독특한 디자인이 눈에 띄었고 가격 대비 품질이 괜찮았으며, 기아 브랜드가 미국에서 조금씩 자리를 잡기 시작했습니다. 1993년 연간 자동차 생산 300만 대를 돌파했고, 기아자동차가 확실히 성장했으며, 현대에 이은 2위 자동차 회사로 자리매김했습니다.

起亞의 정신: 아시아에서 일어나다

기아라는 이름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었는데, 起亞는 한자로 "아시아에서 일어난다"는 뜻이었고, 김철호 창업자가 1952년 이 이름을 지을 때 단순한 회사 이름이 아니라 사명이었으며, 한국을 넘어 아시아와 세계로 나가겠다는 꿈이었습니다. "자전거가 완성되면 자동차, 자동차가 완성되면 비행기를 만들겠다"는 창업 선언이 단순한 구호가 아니었는데, 실제로 자전거에서 삼륜차, 사륜차로 단계적으로 발전했고, 매 단계마다 기술을 쌓았으며, 국산화율을 높이는 데 집착했습니다. 브리사에서 89.5% 국산화율을 달성했을 때 기아 엔지니어들이 왜 그렇게 기뻐했는지 이해할 수 있는데, 외국 기술에 의존하지 않겠다는 자존심이었고, 기술 자립에 대한 집착이었으며, 그것이 기아의 DNA였습니다.

1980년 정부가 승용차를 못 만들게 했을 때 기아가 무너지지 않은 것도 그 정신 때문이었는데, 봉고로 버텼고 합리화 조치가 풀리기를 기다렸으며, 7년 후 프라이드로 화려하게 복귀했습니다. 포기하지 않는 것, 기술을 쌓는 것, 단계적으로 성장하는 것, 이것이 기아 50년의 비결이었고, 훗날 디자인 혁명과 글로벌 성공으로 이어지는 뿌리였으며, 1944년 경성정공의 작은 공장에서 시작된 꿈이 만든 것이었습니다.

⚠️ 1997년, 위기의 그림자

1990년대 중반 기아자동차는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1993년 스포티지, 1992년 포텐샤, 세피아, 캐피탈 등 신차를 쏟아냈고 생산량도 늘었으며, 해외 수출도 증가하고 있었습니다. 1996년에는 대형 세단 엔터프라이즈까지 내놓았고, 현대와 전 세그먼트에서 경쟁하는 완성된 라인업을 갖췄으며, 기아의 전성기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문제가 쌓이고 있었는데, 무리한 설비 투자로 부채가 늘었고 부동산과 금융에 무분별하게 투자했으며, 계열사들이 부실해지고 있었습니다. 1997년 7월 기아그룹이 부도 위기에 처했는데, 그룹 전체 부채가 눈덩이처럼 불어있었고 IMF가 오기도 전이었으며, 정부가 긴급 지원에 나섰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1997년 10월 기아자동차가 부도 유예 협약을 신청했고, 법정관리 절차가 시작되었으며, 현대차, 포드, 대우차 등이 인수 후보로 거론되기 시작했습니다.

1998년 10월 국제 입찰 결과 현대자동차가 기아를 인수하기로 낙찰되었는데, 기아와 함께 아시아자동차까지 현대에 넘어갔고,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자동차 회사가 현대의 품에 안겼으며, 54년 독립 경영의 역사가 막을 내렸습니다. 기아 직원들이 울었는데, 자존심이 강한 회사였고 현대와는 라이벌이었으며, 흡수합병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기아 브랜드가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는데, 현대기아자동차그룹 안에서 기아는 독립 브랜드를 유지했고, 별도 법인으로 운영되었으며, 기아 직원들은 기아 사람으로 남았습니다. 그리고 이 합병은 나중에 기아를 더 크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는데, 현대의 자금력과 기아의 기술력이 결합되었고, 2000년대 이후 기아의 부활을 위한 토대가 마련되었으며, 다음 편에서 그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1987 기아 프라이드 레드 ㅡ AI 이미지

📺 다음 편 예고

한국의 탄생 9편에서는 "기아자동차 2편 - 합병 후 부활"을 다룹니다.

1998년 현대에 합병된 후 위기를 극복하고, 피터 슈라이어를 영입해 디자인 혁명을 일으키며, K5와 스팅어로 세계를 놀라게 한 기아의 부활 이야기를 만나보겠습니다.

80년 역사의 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1944년 12월 11일 경성정공이 시작되었고,
자전거에서 오토바이, 삼륜차, 사륜차로 발전했으며,
1974년 브리사로 한국 최초 국산화 승용차를 만들었습니다.

1987년 프라이드로 미국 시장에 이름을 알렸고,
1993년 스포티지로 SUV에 도전했으며,
연간 300만 대를 생산하는 회사가 되었습니다.

1997년 부도 위기를 맞았고,
1998년 현대에 합병되었지만,
기아라는 이름은 살아남았습니다.

"자전거가 완성되면 자동차, 자동차가 완성되면 비행기를"
起亞의 꿈 - 기아자동차 1편

한국의 탄생 8편 완결.
다음 편: 기아 2편 - 합병 후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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