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한국 자동차의 가장 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정주영이라는 사람이 없었다면
현대자동차도, 포니도, 오늘의 한국도 없었을지 모릅니다.
그 첫 번째 이야기를 함께 만나보겠습니다.
1973년 3월, 서울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독자 모델 개발을 선언했습니다. 사실 이건 세상이 비웃던 결정이었는데 그 이유는 포드와의 합작 협상이 결렬되자 독자 개발을 선언한 것이었고, 세계 자동차 업계는 "허황된 꿈"이라며 코웃음을 쳤으며, 회사 내부에서도 반대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주영은 "좁은 내수시장만으로는 자동차 산업을 영위할 수 없고 수출을 하려면 고유 모델이 필수"라고 확신했습니다.
1976년 1월 26일 포니가 정식 출시되었는데,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으로 두 번째 독자 모델이었고, 이탈리아 디자이너 조르제토 주지아로가 디자인했으며, 출시 첫 해부터 국산화율 85%를 달성했습니다. 그리고 10년 후 엑셀이 미국 시장을 뒤흔들면서 현대자동차는 진짜 글로벌 회사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만나보겠습니다.

1976 현대 포니 오렌지레드 ㅡ AI 이미지
🔧 1967년, 정주영의 결단
정주영은 자동차와 인연이 깊었는데, 1940년 서울 마포구 아현동에서 "아도서비스"라는 자동차 정비소를 인수했고, 단 25일 만에 화재로 불탔지만 포기하지 않고 다시 시작했으며, 자동차가 미래 산업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건설업으로 성공한 정주영은 자동차 산업에 뛰어들기로 결심했는데, 동생 정세영으로 하여금 현대자동차주식회사를 설립하게 했고, 1967년 12월 29일 미국 포드와의 합작으로 시작되었습니다. 1968년 울산 20만 평 부지에 연간 3,500대 생산 능력의 조립 공장을 착공했는데, 설립한 지 1년도 안 됐는데 공장을 짓는 건 이례적이었고 그만큼 속도가 빨랐으며, 같은 해 11월 영국 포드 코티나를 조립 생산해서 첫 차를 내놓았습니다. 국산화율은 21%에 불과했는데, 엔진과 주요 부품은 모두 포드에서 가져왔고, 조립만 한국에서 했으며, 사실상 반제품 조립이었습니다. 하지만 첫 발을 내딛었고,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으며, 더 큰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1971년 현대차가 포드에 합작회사 설립을 제안했는데, 지분 50대 50을 원했지만 포드는 더 많은 지분을 원했고, 기술 이전도 제대로 안 해주려 했으며, 협상이 결렬되었습니다. 1973년 정주영이 포드와 결별을 선언했는데, 그리고 바로 독자 개발을 선언했습니다. 회사 사람들이 반대했는데, "기술도 없는데 어떻게 독자 모델을 만드느냐"고 했고, 전문가들도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정주영은 굽히지 않았습니다. 1973년 정세영 현대자동차 사장이 이탈리아로 건너갔는데, 차체 디자인을 맡길 회사를 찾기 위해서였고, 조르제토 주지아로의 이탈디자인을 찾았으며, 계약을 맺었습니다. 주지아로는 폭스바겐 골프, 피아트 판다를 디자인한 거장이었는데, 한국 회사와 일하는 건 처음이었지만 과제를 받아들였고, 1974년 디자인이 확정되었으며, 10월 토리노 모터쇼에 프로토타입이 공개되었습니다.
🏆 1976년, 포니의 탄생
1975년 2월 울산 종합자동차공장이 완공되었는데, 착공 7년 만이었고 연간 10만 대 생산 능력을 갖췄으며, 포니 생산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1975년 12월 시험 생산 50대를 시작했고, 1976년 1월 26일 포니가 정식 출시되었으며,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 두 번째 독자 개발 승용차였습니다. 4도어 해치백 스타일이었고 첫 출고 가격은 227만 3천 원이었으며, 미쓰비시 새턴 엔진을 얹었지만 차체와 디자인은 완전히 한국 것이었습니다. 국산화율 85%는 놀라운 수치였는데, 출시 첫 해부터 부품의 85%를 국내에서 조달했고, 1981년에는 93%까지 올라갔으며, 기아 브리사와 함께 한국 자동차 기술 자립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포니가 나왔을 때 한국인들이 자랑스러워했는데, "우리 차"라는 자부심이 있었고, 정부도 포니를 적극 홍보했으며, 국민 차가 되었습니다. 1976년 에콰도르로 첫 수출을 했는데, 에콰도르 과야킬 항구에 포니가 내리는 사진이 역사적인 순간을 담고 있으며, 한국 자동차가 처음으로 해외에 나간 날이었습니다.
1979년 포니 2가 나왔는데, 쿠페 버전도 추가되었고 디자인이 더 세련되었으며, 포니 시리즈 판매가 계속 늘었습니다. 1980년 자동차공업 통합조치가 내려졌는데, 현대는 승용차, 새한(대우)은 소형차, 기아는 트럭과 버스로 역할을 나누게 했으며, 현대에게 유리한 조치였습니다. 1982년 포니 엑셀이 나왔는데, 포니를 기반으로 개선된 모델이었고 전륜구동으로 바뀌었으며, 미국 시장 진출을 위한 준비였습니다. 1983년 현대 스텔라가 나왔고, 중형 세단이었으며, 1985년에는 쏘나타 1세대가 나왔습니다. 현대차 라인업이 빠르게 넓어지고 있었는데, 소형부터 중형까지 갖추기 시작했고, 해외 수출 준비가 착착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 1986년, 엑셀의 미국 상륙
1986년 현대 엑셀이 미국 시장에 출시되었을 때 충격이었는데, 출시 첫 해에 무려 168,882대가 팔렸고, 미국에서 외국 브랜드 첫 해 최다 판매 기록이었으며, 자동차 역사에 남을 기록이었습니다. 가격이 결정적이었는데, 기본 가격 4,995달러로 당시 가장 저렴한 차였고, "5천 달러에 새 차를 살 수 있다"는 게 충격이었으며, 젊은이들과 저소득층이 줄을 섰습니다. 품질 문제가 있었는데, 내구성이 떨어진다는 불만이 나왔고 장기 신뢰성에 의문이 제기되었으며, "현대는 싸구려"라는 이미지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현대는 배웠는데, 미국 시장의 기준을 알게 됐고 품질 개선에 집중하기 시작했으며, 이 경험이 훗날 현대의 품질 혁명으로 이어졌습니다. 캐나다에서도 엑셀이 인기였는데, 1984년 먼저 캐나다에 진출해서 첫 해 16만 대가 팔렸고, 캐나다 수입차 판매 1위가 되었으며, 미국 진출의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1988년 쏘나타 2세대가 나왔는데, 전륜구동으로 바뀌었고 더 현대적인 디자인이었으며, 중형 세단 시장에서 점점 영향력을 키워갔습니다. 같은 해 서울 올림픽이 열렸는데, 현대차가 공식 차량으로 쓰였고 전 세계에 현대 브랜드가 노출되었으며, 글로벌 마케팅 효과가 컸습니다. 1990년 그랜저가 나왔는데, 현대 최초의 대형 세단이었고 미쓰비시 데보네어를 기반으로 했으며, 각진 그랜저는 지금도 "각그랜저"라는 애칭으로 불립니다. 임원들이 타는 차였고, 재벌 회장 차였으며, 성공의 상징이었습니다. 1990년대 들어 현대차는 빠르게 성장했는데, 쏘나타, 아반떼, 엑센트 등 라인업이 완성되었고, 해외 수출이 늘었으며, 한국 대표 자동차 회사로 자리를 굳혔습니다.

1986 현대 엑셀 화이트 ㅡ AI 이미지
정주영의 뚝심이 만든 것
정주영이 1973년 포드와 결별하고 독자 개발을 선언했을 때 모두가 무모하다고 했는데, 기술도 없고 자금도 부족했으며, 세계 자동차 산업의 높은 벽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주영의 논리는 명확했는데, 남의 기술에 의존하면 영원히 종속될 수밖에 없고, 독자 모델이 있어야만 진짜 자동차 회사가 될 수 있으며, 수출을 하려면 우리 이름을 달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포니 프로젝트는 3년 만에 완성되었는데, 이탈리아에서 디자인하고, 일본 미쓰비시에서 엔진 기술을 배우고, 한국에서 조립했으며, 출시 첫 해부터 85% 국산화를 달성한 것은 당시로서는 기적이었습니다. 1974년 토리노 모터쇼에서 포니 프로토타입을 공개했을 때 외신이 주목했는데, "한국이 독자 자동차를 만들었다"는 기사가 나왔고, 개발도상국 중 처음이었으며, 세계가 한국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정주영의 경영 방식은 독특했는데, "이봐, 해봤어?"라는 유명한 말처럼 무조건 도전하는 것이었고, 안 된다는 말을 듣지 않았으며, 실패해도 다시 시도하는 것이었습니다. 현대차 초창기에 기술 인력이 부족했는데, 해외에서 한국인 엔지니어를 스카우트했고, 일본과 영국의 기술자들을 초청했으며, 그들에게 아낌없이 투자했습니다. 1974년 영국 브리티시 레일랜드 부사장 조지 턴불을 임원으로 영입한 것도 그 일환이었는데, 세계적인 자동차 전문가를 한국 회사에 데려온 것이었고, 그의 경험이 포니 개발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런 과감한 투자와 도전 정신이 포니를 만들었고, 엑셀의 미국 진출을 가능하게 했으며, 현대차가 오늘날 세계 3위 그룹이 된 뿌리가 되었습니다.
🎯 1990년대, 본격 글로벌 준비
1990년대 현대자동차는 질적 성장을 추구하기 시작했는데, 1986년 엑셀의 미국 진출 이후 "싸지만 품질이 낮다"는 이미지가 문제였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시작되었습니다. 1990년 현대차가 자체 엔진 개발에 성공했는데, 알파 엔진이었고 외국 엔진에 의존하지 않는 첫 번째 자체 개발 엔진이었으며, 기술 자립의 중요한 이정표였습니다. 1991년에는 베타 엔진도 나왔고, 엔진 독자 개발 능력을 확보했으며, 진짜 자동차 회사의 요건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1992년 울산에 현대자동차 연구개발센터를 열었는데, 자체 기술 개발에 집중하겠다는 의지였고, 이후 현대차 기술 발전의 산실이 되었으며, 수천 명의 엔지니어들이 미래 차를 연구했습니다. 1993년 아반떼가 나왔는데, 엘란트라라는 이름으로 수출되었고 더 현대적인 소형 세단이었으며, 미국에서도 반응이 좋았습니다. 1994년 쏘나타 3세대가 나왔는데, 자체 개발 엔진을 달았고 품질이 크게 향상되었으며, 이전 세대와는 다른 평가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1995년 현대자동차가 연간 100만 대 생산을 돌파했는데, 창립 28년 만이었고 세계 자동차 회사 순위에 들기 시작했으며, 한국 경제의 자랑이 되었습니다. 같은 해 앨라배마에 미국 현지 공장 건설을 검토하기 시작했고, 미국 소비자에게 "미국에서 만든 현대차"를 제공하겠다는 전략이었으며, 장기적인 미국 시장 공략의 포석이었습니다. 하지만 1997년 IMF가 왔고, 기아를 인수하면서 부채가 늘었으며, 위기를 맞게 되지만 그게 오히려 더 강해지는 계기가 됩니다. 다음 편에서 현대차의 품질 혁명과 글로벌 도약 이야기를 이어가겠습니다.

1993 현대 쏘나타 ㅡ AI 이미
1967년 12월 29일 정주영이 현대자동차를 세웠고,
1968년 포드 코티나로 첫 차를 만들었으며,
1973년 포드와 결별하고 독자 개발을 선언했습니다.
1976년 포니가 탄생했고 아시아 두 번째 독자 모델이었으며,
국산화율 85%로 "기술의 현대"가 되었습니다.
1986년 엑셀이 미국에서 첫 해 168,882대를 팔았고,
1990년대 자체 엔진 개발에 성공했으며,
연간 100만 대 생산을 달성했습니다.
"이봐, 해봤어?"
정주영의 뚝심 - 현대자동차 1편
한국의 탄생 10편 완결.
다음 편: 현대 2편 - 품질 혁명과 글로벌 도약